<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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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On Liberty> John Stuart 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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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 아래의 3가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된다.
1. 자유로운 사회는 왜 번영하는가?
2.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가?
3. 표현의 자유는 왜 중요한가?

진정으로 가치 있고 위대한 인간

다수의 압력이나 국가의 통제에 굴하지 않고, 강한 에너지(활력)를 바탕으로, 자기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며, 끊임없이 생각하고 성장하는 개성(Character)을 가진 인간.


만약 모든 인류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고, 그 한 사람이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류가 그 한 사람의 의견을 침묵시키는 것은, 그 한 사람이 권력을 가졌을 때 전 인류를 침묵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하지 않다. p.46
    • 의견의 옳고 그름은 과반수로 정해질 수 없음. 사실과 논증에 의해 판단되어야 함.
    • 소수가 옳을 수도 있고, 소수가 틀렸더라도 그 소수의 의견은 가치가 있음. 반대 의견과 부딪혀야 자신의 생각을 검증하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 반론이 없는 신념은 '맹신'으로 이어지기 쉬움.
    •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의견까지도 말할 자유를 인정하는 것. 그렇지 않으면 권력을 가진 쪽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을 언제든 침묵시킬 수 있게 됨.


만약 우리의 의견이 틀릴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의견에 근거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이익을 방치하고,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 않게 될 것이다. p.50
    •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권리까지 포기해서는 안 됨.
    • 틀릴 가능성은 개인의 자유를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다. 오히려 자유로운 판단과 행동을 통해 배우고, 수정하고, 책임지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다.
    • '오류를 피하는 사회'보다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을 주도하기 위해 우리의 의견이 옮다고 가정해야 하며, 이런 가정은 우리가 악인들이 오류에 찬 해로운 의견을 퍼뜨려 사회를 타락시키는 일을 금지할 때 그러는 것과 다르지 않다. p.51
    • "내가 옳다고 믿는다""내가 절대 옳으니 다른 사람은 말할 권리가 없다"는 전혀 다른 주장. 내 판단을 절대 진리로 만들어 남의 입을 막아서는 안됨.
    • 이성을 가지고 판단하는 인간을 신뢰하지만, 동시에 그 이성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 그래서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이 계속되어야 사회가 스스로 오류를 수정하며 발전할 수 있음.


우리가 가장 정당하다고 확신하는 믿음조차 계속 검증에 열려 있어야 한다. 이 외 그 어떤 안전장치도 두지 말아야 한다. 만약 검증하려는 시도가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받아들여졌음에도 검증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확실성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검증에 열려있다면, 우리는 현재 인간 이성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어떤 것도 소홀히 않고 진리에 이를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검증의 장이 열려 있는 한 더 나은 진리를 찾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만약 더 나은 진리가 존재하고 인간이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말이다. 이럴 수 있다면, 우리 시대에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진리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로서 이를 수 있는 확실성의 한계이며, 이것이 확실성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다. p.54
    • 진리는 '의심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검증을 견뎌내고 있는 상태'.
    • "나는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가 모든 논의의 출발점.
    • 반대 의견을 막지 말고, 계속 검증하라.
    • 내 신념이 정말 옳다면, 비판과 반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 오히려 그런 검증을 거치면서 그 신념은 더 강해짐. 반대로 비판 자체를 금지한다면, 그 믿음이 옳아서 살아남은 것인지, 아니면 비판이 금지되어 살아남은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됨.
    • 지금까지 가능한 모든 비판을 허용했고, 그 과정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결론에 도달했다면, 그것이 현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진리다.


정통적인 결론과 상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든 질문을 금지하는 조치로 인해 퇴행하는 것은 이단자들의 정신이 아니다. 가장 큰 해악을 입는 것은 이단이 아닌 사람들의 정신이다. 이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이들의 전반적인 정신발달이 억눌리고 이성이 위축된다. p.73
    • 검열의 가장 큰 피해자는 소수가 아니라 다수.
    • 질문을 금지하면, 과연 누가 가장 큰 피해를 입는가?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다수는 더 이상 자신의 믿음을 검증할 기회를 잃는다.
    • 오히려 다수의 사람들조차 "혹시 질문했다가 오해받을까?", "이건 물어봐도 되는 건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진실을 탐구하는 대신 분위기를 읽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이성이 아니라 눈치를 훈련하게 되는 것. "정신적 위축 상태'가 바로 이것.
    • 처음에는 상대 진영만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같은 진영 안에서도 질문하는 사람이 사라진다. 결국 모두가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고,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음.
    • 예를 들어 인종차별이나 여성차별에 반대하는 운동도, 과거에는 기존 사회에서 "이단" 취급을 받음. 만약 당시 사회가 "정통적인 가치와 다르다"는 이유로 질문과 반론을 모두 금지했다면, 시민권 운동도 여성 참정권 운동도, 노동권 운동도 성장하기 어려웠을 것.
    • 즉, 오늘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많은 가치도 한때는 '이단의 의견'이었음. 그래서 자유주의는 특정 진영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 의견이 기존 질서에 도전할 수 있는 공간 자체를 보호하려는 철학임.
    • 질문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진실보다 정답이 중요해지고, 논리보다 충성이 중요해짐. 자유주의가 표현의 자유를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사회의 지적 건강을 유지하는 제도로 보는 이유. 자유로운 질문은 상대를 이기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오류를 줄여 나가기 위한 안전장치인 것.


그 의견이 아무리 진실이라 하더라도 이를 두고 충분히(fully),자주(frequently), 두려움 없이(fearlessly) 논의할 수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니라 죽은 독단으로 고정되어버릴 것이다. p.76
토론이 부재하면 의견의 근거만 잊히는 게 아니다. 너무나 자주 그 의견 자체의 의미까지도 잊힌다. 그 의견을 전달하는 단어들이 더는 그 안에 담긴 발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거나, 처음 의도했던 발상 일부만 전달하게 된다. 생생한 관점과 살아 있는 믿음 대신, 암기된 몇 마디 문구만이 남는다. 혹 일부 의미가 남더라도, 본질적인 핵심은 잃어버리고 껍데기와 외형만이 남는다. 인간의 역사에서 위대한 국면들은 이런 사실로 가득 차 있다. 이에 대해선 아무리 강조하고 숙고해도 지나치지 않다. p.83
인류는 어떤 사안에 대해 더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때 생각을 멈추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치명적이며, 그들이 저지르는 오류 절반의 원인이다. p.90
    • 진리는 반복해서 검증될 때 살아 있고, 검증이 멈추는 순간 독단이 됨. 어떤 의견이 실제로 옳다고 해도 토론과 반박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왜 그것이 옳은지 잊게 됨. 결국 신념은 사라지고 구호만 남음.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외우는 상태가 되는 것.
    • 이 현상은 정치, 종교, 교육 어디에서나 나타남.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논리로 설명하기보다 "원래 그런 것",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로 대신하기 시작함.
    • 자유주의가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이유는 오류를 발견하기 위함보다 옳은 의견조차 살아 있게 만드는 제도이기 때문.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이유는 욕망이 강해서가 아니라 양심이 약하기 때문이다. 강한 충동과 약한 양심 사이에는 자연적인 연결점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한 사람의 욕망과 감정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고 더 다양하다는 것은 그가 단지 인간 본성의 원료를 더 많이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더 많은 해악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더 많은 선을 행할 능력도 있음을 의미한다. 강한 충동은 단지 활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활력을 나쁜 데 쓸수도 있지만, 게으르고 무감각한 성격보다 활력이 넘치는 성격에서 항상 더 많은 선을 끌어낼 수 있다. 타고난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일수록 교양 있는 감정을 더 많이 일굴 수 있다. 강한 감수성은 개인적 충동을 생생하고 강력하게 만든다. 또한 이런 강한 감수성이 미덕에 대한 가장 열렬한 사랑과 가장 엄격한 자기 통제를 생성하는 근원이다. 사회는 이런 감정과 충동을 배양함으로써 자기 의무를 다하고 자기 이익을 보호한다. 이런 감정과 충동을 다룰 방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영웅을 만드는 원천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욕망과 충동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이를 일구어 교양을 형성하고 수정하며 자신의 본성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개성 character'이 있다고 표현한다. 자신의 욕망과 충동이 자신의 것이 아닌 사람은 독특한 개성 없는 증기기관과 마찬가지다. 만약 강한 의지로 다스리면서 자신의 욕망과 충동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다면, 개인은 활력 넘치는 개성을 가질 수 있다. p.121
타인의 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들을 단지 그들이 느끼는 불쾌감 때문에 억압하는 일은 아무런 가치 있는 것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개인이 얻을 수 있는 건 그 억압에 저항하면서 드러날 수 있는 강한 성격 정도다. 만약 이런 억압에 순응한다면, 개인의 본성은 둔화하며 무뎌지고 만다. 각자의 본성을 공정하게 발휘하게 하려면, 반드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삶을 살도록 허용해야 한다. 어느 시대이든 이러한 자유가 실현된 정도에 따라 후대가 그 시대를 주목했다. 개별성이 존재한다면 심지어 독재조차 최악의 결과를 내진 않는다. 하지만 개별성을 억압하는 모든 것은 독재이다. 그것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상관없다. p.127
    • 욕망에 선과 악은 없다. 에너지일 뿐. 사람들은 흔히 "욕망이 강해서 나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욕망이 아니라 그것을 다스리는 능력임.
    • 욕망이 강한 사람은 범죄자가 될 가능성도 있지만, 반대로 위대한 예술가, 기업가, 혁신가, 영웅이 될 가능성도 함께 가진다. 강한 욕망은 선과 악을 모두 만들어낼 수 있는 생명력이다. 따라서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교양과 이성으로 다룰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 욕망을 없애는 사회보다 욕망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임.
    • 사회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만 제한해야 한다. 사회는 불쾌감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까지는 보장하지 않는다.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 어디까지인지는 합의가 필요)
    • 사람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갈 자유를 빼앗는 모든 힘은 독재임. 그 힘은 국가일 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고, 회사일 수도 있고, 심지어 여론과 SNS의 집단 압력일 수도 있음. 법으로 처벌하지 않아도 "그렇게 행동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사람들은 결국 자기답게 살기를 포기하게 됨. 그래서 자유주의는 국가 권력뿐 아니라 다수의 압력도 경계한다.

천재는 항상 소수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천재를 배출하려면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보존해야 한다. 천재는 자유로운 환경에서만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다. 천재라는 용어 그 자체에서 알 수 있듯, 천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개별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해로운 억압 없이 이들을 사회가 자신의 편리를 위해 마련한 몇몇 정해진 틀에 무리 없이 끼워 맞추긴 쉽지 않다. 만약 천재들이 소심하게 이러한 틀 중 하나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에 동의한다면, 그런 억압 아래 확장되지 못하는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사회가 이들의 천재성에서 이득을 볼 일은 거의 없다. 반면 강한 개성을 지닌 이들이 그 족쇄를 깨뜨린다면, 평범함으로 동화시키는 데 실패한 사회는 그들을 '난폭하거나,' '기이한' 존재로 지목하며 경고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p.129-130

민주적 정부나 다수의 귀족이 통치하는 정부든, 정치적 행위이든, 그 정부가 육성하는 의견이든 자질이든 사고방식이든, 오직 주권자 다수가 더 뛰어난 재능과 교육을 받은 소수의 조언과 영향력을 받아들일 때에만 평범함을 넘어설 수 있었다. 모든 지혜롭거나 고귀한 일의 시작엔 개인들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처음엔 개인 한 사람이 시작한다. 평범한 사람의 영예와 자랑은 그가 그런 시작을 따라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p.132

나는 관습을 따르지 않는 일에 최대한 자유를 부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관습을 따르지 않는 일 중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관습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립적인 행동과 관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를 단지 지금보다 더 나은 행위 방식을 찾을 여지를 준다는 이유만으로 장려하자는 건 아니다. 앞으로 널리 채택할 만한 더 가치있는 관습을 새로이 발견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유만도 아니다. 더하여, 정신적 우월성을 가진 사람들만이 자기 방식대로 삶을 살아갈 정당한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인간의 삶이 단 하나의 방식이나 소수의 방식에 따라 구축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의 상식과 경험이 있다면, 그의 삶을 설계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가장 뛰어나서가 아니라 바로 그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에게 가장 적합하다. p.134

빌헬름 폰 훔볼트는 이미 한 차례 인용한 구절에서 사람들이 서로 다르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조건을 인간 발전의 필수 조건으로 지적했다. 바로 자유상황의 다양성이다. 이 중 두 번째 조건은 이 나라에서 매일 악화하고 있다. 서로 다른 계층과 개인을 둘러싸고 그들의 개성을 형성하는 환경이 날마다 더욱 동질화되고 있다. 과거에는 서로 다른 계급, 지역, 직업, 전문직에 속한 사람들이 각각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의 환경이 달랐다. 그러나 현재는 상당 부분 비슷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비교하자면, 이들은 이제 똑같은 것들을 읽고, 똑같은 것들을 듣고, 똑같은 것들을 보고, 똑같은 장소를 방문하며, 똑같은 목표를 향해 희망과 두려움을 품고, 똑같은 권리와 자유를 누리고, 이를 주장할 똑같은 수단을 지니고 있다. (...) 이러한 변화들이 낮은 계층을 끌어올리고 높은 계층을 끌어내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확장은 이를 더욱 부추기는데, 교육이 사람들에게 공통된 영향을 미치고, 오랫동안 축적한 사실과 감정에 접근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통신 수단의 발전 또한 이를 촉진한다. (...) 다양한 사회적 특권이나 지위가 점차 평준화됨에 따라, 과거 이러한 특권과 지위를 누리던 사람들이 다중의 의견을 무시할 가능성이 줄어든 상태다. (...) 다시 말해, 수의 우위에 맞서면서 공중의 의견과 상반되는 견해나 개성을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력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p.144

많은 사람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어떤 행위를 자신에 대한 피해로 여기고, 이를 자기감정에 대한 모욕으로 느끼며 분개한다. (...) 한 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대해 가지는 감정과 다른 사람이 그 의견에 불쾌감을 느끼는 감정 사이에는 어떠한 균등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도둑이 지갑을 가져가고자 하는 욕망과 주인이 지갑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 사이의 차이와 같다. 한 사람의 취향은 그의 의견만큼이나, 지갑만큼이나 개인적인 문제다. p.166

국가 교육에 대해 제기되는 합리적인 반대의 초점은 국가가 교육을 강제한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국가가 그 교육을 직접 관리한다는 데 있다. 이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국민 교육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국가의 손에 맡기는 일을 나는 누구보다 반대한다. (...)일반적인 국가 교육은 사람들을 틀에 넣어 서로 똑같이 찍어내기 위한 단순한 장치에 불과하다. 그 틀이 형성되는 방식은 정부 내에서 지배적인 권력이 누구이든 간에 그들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정해진다. 이 교육이 효율적이고 성공적일수록 정신에 대한 독재가 확고해지고, 이는 자연스럽게 신체에 대한 독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p.207

국가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그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가치에 달려 있다. 만약 국가가 개인들의 정신적 성장과 고양보다 사소한 행정기술이나 세세한 업무처리 실행에서 얻는 기술을 우선시한다면, 즉 유익한 목적을 내세워 사람들을 왜소하게 만들어 정부에 더 순응하는 도구가 되게 한다면, 그 국가는 그렇게 작아진 사람들과는 결코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모든 것을 희생하여 완벽하게 만든 그 기계 역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 기계를 더 원활하게 작동시킨다는 명분으로, 정작 기계를 작동하는 데 필요한 생명력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p.222
  • 국가의 목적은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인간을 만드는 환경을 만드는 것.
  • 행정은 효율적이고, 법은 촘촘하며, 국민은 모두 규칙을 잘 따른다고 해보자. 겉으로는 완벽한 국가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고, 창의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면 그 국가는 결국 껍데기만 남는다. 기계는 완벽해졌지만, 그 기계를 움직일 인간의 활력과 창조성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국가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국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지 국가를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님.
  • "그 정책은 사람들을 더 자율적이고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만드는가, 아니면 국가에 더 의존하는 존재로 만드는가?" 복지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님. 국가가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하는 구조가 개인의 판단력과 책임감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함.
  • 좋은 국가는 국민을 잘 통제하는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 국가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국가임.
  • 질서는 '수단'일 뿐,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됨. 국가가 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교육을 획일화하고, 여론을 통제하며, 개인의 삶을 지나치게 간섭하는 순간 사회의 활력은 죽어버림.
  • 질서라는 안전망을 짜되, 그 안에서 개인들이 마음껏 거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을 제공하는 것.

-해제-

공적 토론에서 주류 의견을 가진 이들이 가져야 하는 중요한 태도는 '경청'이다. 밀은 상반되는 의견을 들어야만 한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 밀이 종교를 경계한 이유는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 대다수가 이미 '영원불변한 진리'를 완고하게 쥐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종교적 신념이 깊을수록 극단주의로 치닫고, 타자의 의견을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종교적 신념이 깊은 사람들일수록 신의 말씀이란 진리 안에서 산다. 이들에게 자신들이 지닌 진리는 결코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신의 말씀이기에 그 무엇도 반박할 수가 없다. 타인의 말을 더 들을 필요조차 없다. p.245
밀은 사회에 내재한 개별성을 억누르는 성향이 오히려 전체 사회의 발전을 억제한다고 비판한다. 한 사람의 뛰어난 천재가 수천 명의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사회에 이바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재는 오직 "자유로운 환경에서만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다." 자유는 "천재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다.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독창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 때만 천재들도 자유롭다.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그럴 수 있을 때만, 천재들이 발산하는 독창성을 사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p.246
밀은 이런 다양한 감정의 발산이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생각해보면, 명예욕이 창조성을 발휘하는 원천일 수 있고, 이런 욕망에서 나온 지식과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 이런 욕망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마음껏 발산할 수 있어야 한다. p.248
어쩌면 우리는 누구도 와보지 못한 극단주의의 시대에 도달해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탈출구는 없는 것일까? 밀은 때로 우리를 극단으로 몰아가는 이기적인 인간 욕망의 반대편에 자신을 풍요로운 존재로 일구려는 또 다른 욕구가 있다고 믿었다. 밀은 그 욕구 중 하나로 '자기 존중감 self-respect'을 꼽았다. 거짓으로 자기 존중에 이를 수는 없다. 짓으로 치장한 자기만족은 '자기 존중'이 아니라 '자기 기만'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형식이든 존중엔 최소한의 도덕적 기반이 필요하다. 반약, 여전히 우리가 도덕적 존재라는 데 일말의 믿음이 남아 있다면, 공적 삶에서 자기 존중을 향한 탈출구는 '오류가능성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열릴 것이다. p.258